* 주의! 본 글은 어느 정도 애플 빠의 시선을 가지고 썼으니 다소 불편하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하시고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어린 시절 '천재소년 두기'를 봤을 때 파란색의 컴퓨터 화면에 일기를 쓰는 장면은 정말로 대단해 보였습니다. 그때 두기가 되고 싶었던 소년은 단순히 리포트나 쓰는 용도로 Mac을 다루지 않고, 두기가 했던 것처럼 내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될 수 있을 정도로 유기적인 관계를 원했습니다.
천재소년 두기
한 소년이 운전면허 시험 도중 차에서 내려 사고현장으로 달려가 부상자를 살핍니다. 잠시 후 경찰들이 와보니 속된 말로 꼬맹이가 사고현장에서 설치고 있어 비키라고 하지만 그 소년은 당당하게 의사 면허증을 내보입니다. 소년은 당황해 하는 경찰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능숙하게 응급처치를 하고, 경찰들은 멍해진 얼굴로 누구냐고 묻자 어머니는 자랑스러운 얼굴로 'My Son'이라고 대답합니다. 한 천재소년이 병원 인턴 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고 배워나가는 성장드라마 '천재소년 두기'의 오프닝 장면입니다.
1989년 방영되어 전 세계적으로 굉장히 인기있었지만, 당시 매우 어렸던 저는 그다지 재밌게 보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바로 전 프로그램이 당시 애들은 누구나 좋아했던 '슈퍼소년 앤드류'였기 때문이거든요. 그래도 드라마가 끝나기 직전 두기가 그 날 있었던 일을 일기로 쓸 때-정말로 대단해 보였던- 그 파란 화면의 컴퓨터는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슈퍼소년 앤드류와 함께 모든 어린이가 되고 싶어했던 천재소년 두기>
파란화면의 일기장
요즘은 미드가 하나의 또 다른 TV 장르처럼 인정받고 있습니다. 저도 남들 다 좋아한다는 Prison Break나 CSI같은 드라마를 좋아했고 요즘은 왕좌의 게임이 언제 나오나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좀 더 볼만한 미드를 찾아다니다가 누군가의 블로그에서 '천재소년 두기'에 관한 글을 읽고는 다시금 그때의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뭐, 두기에 대한 추억이래 봤자 기억나는 장면이라곤 울리는 듯한 멋진 독백과 함께 파란 화면에 일기를 쓰는 게 고작이었는데, 사실 당시 학교에서 가정조사 할 때 자동차, 에어컨과 함께 컴퓨터도 중요한 조사대사 중 하나였을 정도로 컴퓨터가 귀했던 터였거든요. 그래서인지 두기의 일기장 장면은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탐크루즈가 허공에 대고 손으로 쓱쓱 문지르면서 컴퓨터를 제어하는 것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었습니다.
두기가 컴퓨터를 쓰던 때 우리 반에 컴퓨터를 가진 친구는 아무도 없었고 초등학교 4학년이 되어서야 286컴퓨터를 가진 친구를 한 명 만나볼 수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저는 두기가 일기 쓰는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나도 컴퓨터로 일기를 쓸 날이 올 거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컴퓨터가 보급되고 대한민국이 윈도우 월드가 되었을 땐 컴퓨터로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을 안 해봤던 것 같습니다. Mac을 접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Mac에 뭔가 의미를 담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주변에 아무도 Mac 쓰는 사람이 없어서... 인기 없는 자식이라 떡 하나 더 주고 싶은 건지 나름대로 애플빠 정신이 있었던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랬습니다.
<한 회가 끝날 때마다 나오는 두기의 일기. 나에게 있어 두기가 천재였던 것보다 컴퓨터로 일기를 쓴다는 게 더 부러웠다.>
두기가 되고 싶었다.
저는 일주일에 2번 정도는 꾸준히 일기를 씁니다. 반드시 100년 이상 가는 중성지만 사용해야 했고, 너무 두꺼운 일기장은 어느 정도 쓰다 보면 상태가 망가지는 경우도 있어 이걸 핑계 삼아 어린 시절 두기가 했던 대로-어떻게 보면 시늉에 가까울 수도 있지만- 몇 년 전부터 Mac으로 일기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Mac에 일기를 쓸 수 있는 응용프로그램은 많지만 무료 소프트웨어 Journler(www.journler.com)을 설치하였습니다. Journler를 골랐던 이유는 당시 일기장 프로그램에서 보기 힘들었던 캘린더 앱과 같은 작은 달력이 들어있기 때문이었죠. 태그도 설정하여 관련 일기를 한꺼번에 추려낼 수 있고 사진이나 동영상 파일도 끼워 넣을 수 있습니다. 일기에 파일을 넣는 건 손으로 쓰는 일기엔 불가능하기 때문에 쏠쏠한 재미까지 느껴졌습니다.
두기와 컴퓨터와의 관계는 일기 때문인 것처럼 저 또한 Mac과 자신을 엮어주는 뭔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디지털 라이프를 즐긴다라고 뭉뚱그리지 않고 「Mac은 내 일기장이야.」 혹은 「Mac은 내 전공 노트야.」라고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처럼 뭔가 Mac만으로 할 수 있는 걸 찾고 있었습니다. Mac을 도구라는 수동적 의미의 수단으로 두지 않고 두기처럼 생활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었거든요. 전 그게 두기처럼 일기장이 되기를 조금은 바랬었죠.
<두기를 흉내 내보려 사용해봤던 journler, 하지만 역시 일기는 손으로 써야 맛깔난다.>
마치 블로그에 포스팅하는 느낌이랄까. Mac으로 일기를 몇 번 써보고 언뜻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어르신들이 컴퓨터에 적응 못 하는 것처럼 혹시 내가 적응을 못 하는 게 아니겠느냐고 생각도 해봤지만 한 번 더 생각해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았습니다. 소위 할머니들께서 김치를 담글 때 말씀하시는 '손맛'이라는 것이 느껴지질 않았습니다. 오래전에 썼던 일기를 들춰봤을 땐 그곳에 쓰인 문장으로 인해 기억이 돋아나고 이미 누렇게 바래버린 종이의 연필 흔적에선 뭔가 정의 내리기 힘든 향기가 시각과 촉각을 통해 전해지는데 키보드로 두드려서 쓰는 일기는 뭔가 딱딱했습니다. 오래전 써뒀던 글을 읽어봐도 키보드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 건 아니었습니다. 분명 그랬죠. 두기녀석 나보단 잘 생기고 똑똑해도 추억은 좀 덜하겠군...
그러나 어른이 되어버린 나는...
학창 시절 주변 사람들은 저에 대해 그냥 예쁜 컴퓨터 쓰는 학생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컴퓨터가 엘리트, 부르주아의 이미지를 가진 서울 올림픽 시절이었다면 소개팅에 나가서 「저는 Mac을 씁니다」 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미팅이라도 나가 파트너로부터 취미가 뭐냐고 질문을 받으면 그는 눈빛부터 달라지면서 서슴없이 선언해 버린다.
「컴퓨터가 내 유일한 취미요」
<이런 오글오글 거리던 시절이 있었지. 월간 컴퓨터 학습 창간호 (1983년 11월)>
그런데 요즘같이 컴퓨터 하면 '게임광' '폐인' '운동부족'이라는 이미지가 함께 떠오르는 시대에 그런 말을 했다간 ㅡㅡ;; 이런 표정을 지으리란 걸 충분히 예상하기 때문에 누구한테도 「나는 Mac을 써요」 라고 말을 하지 않습니다. 두기가 HP데스크탑(사실 얼마 전까지 그게 매킨토시인 줄...)으로 일기를 쓰는 장면을 보고 신기해하던 시절이 이미 지났습니다. 하드웨어든 소프트웨어든 컴퓨터를 취미로 둔 다는 게 자랑할만한 일이 되는 시절도 지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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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더 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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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글은 예전에 썼던 글인데 그 당시와 지금 생각이 어느 정도는 바뀌었습니다. 사회 저변에 깔린 IT 성향이 많이 달라졌더군요. 몇 년 전만 해도 IT라면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옮겨가는 때라 적응이 잘 안 되면 거부감도 있고 했는데, 요즘은 사물 인터넷이니 뭐니 해서 디지털을 다시 아날로그로 끄집어내려는 시도가 많이 보이고 있습니다. 더군다나 클라우드 시대라고 할 만큼 정보를 바라보는 시각이나 중요성 측면에선 많이 발달해버린 시대가 됐죠.
<요즘은 그냥 프로그램을 쓴다. 편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아날로그에서 하던 일을 디지털로 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저 때는 그래도 손맛이 최고야! 였는데 요즘은 Mac으로 일기를 쓰고 있습니다. 요즘 일기장 프로그램은 UI도 훌륭하고 키워드나 검색 기능이 잘 되어있더군요. 다만 디지털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것처럼, 또 나름 대세였던 journler가 잊힌 것처럼 사용 중인 프로그램이 사라지면 그 안의 자료 백업이 문제이긴 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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